수업 보따리/역사 자료

세도정치

검피아줌마 2013. 5. 22. 11:40

<세도정치에 대해서>

『세도정치란 왕이 아닌 사람이나 가문이 모든 권력을 쥐고 행하는 정치 형태를 말한다.

순조, 헌종, 철종은 조선의 왕 중 가장 존재감이 없는 왕들이다. 이 당시 조선은 왕이 아닌 '안동 김씨(때론 풍양 조씨)'가 다스리는 나라였고, 왕은 허수아비 역할만 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부터 시작된 '당쟁'은 피바람을 몰고 왔지만, 서로의 당을 견제하는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하지만 '당쟁'다음에 등장한 '세도정치'는 조선을 몰락으로 이끌 뿐이었다. 견제 세력이 전혀 없는 세도가문들은 제멋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 중 가장 무기력했던 조선의 세도정치의 시기.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1. 정조가 죽은 이후의 조선 - 조선은 당쟁에서 세도정치로!

1800년 순조 즉위 ;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정조의 개혁은 물거품이 되다!

정조가 죽자 11살 순조가 왕위에 올랐고, 자연스럽게 궁중에서 서열상 가장 어른인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15살 때 66살 영조에게 시집온 왕비로, 사도세자 죽음에 앞장섰던 노론 가문의 딸이다. 정조 때 오빠 김귀주가 유배되어 죽고, 노론의 입지가 날로 좁아지자 정순왕후는 정조와 사사건건 대립했고, 정조가 죽었을 대 그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심도 받았다. 이런 '정순왕후'가 조선의 정권을 잡자 '노론(벽파)'은 다시 부활했고, 나라를 위한 정조의 개혁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규장각엔 먼지만 쌓였고, 재정 지원이 끊긴 장용영은 없어졌으며, 화성은 잊혀졌다.

1801년 신유박해 ; 정조의 사람들 싹쓸이 제거, 인재가 사라지다!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정조에게 호의적이었던(눈엣가시 같은) 노론 시파와 남인을 몽땅 제거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꼬투리가 될 만한 것을 찾던 중 노론 시파와 남인 쪽에서 '천주교'를 믿는 자들이 많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정순왕후는 당장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였는데, 이것이 '신유박해'이다.

이 때문에 전국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정조의 총애를 받던 이가환, 이승훈 등이 목숨을 잃고, 정약용, 정약전 등은 유배를 가게 되었다. 조선의 유능한 인재들이 수없이 죽어 나갔다.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이렇게 정적을 제거하고 완벽한 노론 벽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갔다.

1804년 정순왕후의 죽음 ;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시작하다!

정순왕후는 순조의 왕비를 정하는 일이 마음에 걸렸다. 정조가 생전에 아들 순조의 짝으로 '노론 시파'김조순의 딸을 선택했는데, 이를 뒤집어야 할지 고민이었던 것이다. 노론 벽파는 반대했지만, 정순왕후는 정조의 뜻대로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들였다. 그리고 이것은 노론 벽파에게도 조선에게도 뼈 아픈 실수였다. '김조순'은 정순왕후가 죽고 순조와 친정을 시작하자, 숨겨 놓은 발톱을 드러냈다. 김조순은 노론 벽파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안동 김씨'사람들을 앉히고 조선의 정권을 장악했다. (사실 신유박해 때 유능한 인재들이 몽땅 죽어 쓸 만한 인재가 남아 있지도 않았다.) 조선의 새로운 주인으로 안동 김씨가 등장하면서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2. 당쟁보다 더 무서운 세도정치의 역사

* 3대 60년동안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 조선의 허수아비 왕

김조순의 등장으로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잠깐 풍양 조씨와의 경쟁으로 주춤한 것을 제외하면) 순조, 헌종, 철종의 3대를 거치면서 장장 60년동안 이루어졌다. 무릇 견제 세력이 없는 독재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붕당 정치 시대에는 견제 당이 있어 서로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멋대로 나라를 운영할 수 없었지만, 아무 견제 세력이 없는 안동 김씨는 브레이크 없이 마구 달렸다. 조선은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순조 ; 세도정치, 그 시작을 열다

순조는 15살에 직접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지만, 조선의 모든 권력은 장인인 '김조순'이 쥐었다. 그때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순조는 '풍양 조씨' 가문의 딸을 세자빈으로 들이고,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킴으로써 안동 김씨를 정계에서 몰아내려고 했지만, 효명세자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는 순조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무기력해진 순조는 아무런 치적 없이 45살로 생을 마감했다. 순조가 죽음으로써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헌종 ; 풍양 조씨 vs 안동 김씨, 팽팽한 대결

8살에 왕이 된 헌종은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할 때는 안동 김씨, 직접 정치를 하면서는 풍양 조씨의 조종을 받으며 허수아비 왕 노릇을 했다. '풍양 조씨'라는 새로운 세도가문이 등장했지만, 세도 정치는 더욱 업그레이드 되었다. 이때 서양의 배들이 자주 해안에 나타났지만, 세도 가문은 당시의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힘들고 불안했다. 외척 세도가에 둘러싸여 큰소리 한번 내지 못했던 헌종은 몸까지 병들어 후사도 없이 23살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철종 ; 세도정치, 점점 더 악랄해지다

'풍양 조씨'에게 정권을 빼앗긴 경험이 있는 '안동 김씨'는 헌종이 아들 없이 죽자, 재빨리 강화도에서 농사 짓던 왕족 '이원법'을 불러들여 왕으로 삼고, 안동 김씨 가문의 딸을 왕비로 들였다. 안동 김씨가 자기 마음대로 나라를 주무르기에 무지랭이 농부 출신 '철종'만큼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철종은 빈민 구제에 정성을 쏟았고 탐관오리를 혼내려 했다. 하지만 탐관오리들이 세도가와 연결되어 있어 그 뜻이 좌절된 철종은 무기력하게 왕위를 이어가다가 33살에 세상을 떠났다.

3. 세도정치의 결과 - 조선, 흔들리다

* 세도정치 60년동안 매관 매직이 성행했고, 돈으로 벼슬을 산 관리들은 백성들을 착취했다.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키고, 차라리 도적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조선 사회는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결과 1) 조선의 관리는 썩었고 조선의 왕족은 씨가 말랐다.

세도 정치 아래에서 '안동 김씨(잠깐 동안 풍양조씨)'에게 안되는 일은 없었다. 안동 김씨는 조선의 병권, 인사권, 재정권까지 모든 것을 장악했으며, 국가의 모든 기밀과 보고사항은 안동 김씨와 먼저 의논한 뒤에야 왕에게 전해졌다. 당연히 군신 관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고, 부정 부패는 절정에 이르렀다.

과거제도는 유명무실해졌고, 관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돈과 뇌물을 안동 김씨에게 갖다 바쳤다. 관리 인사는 조정에서가 아닌, 안동 김씨의 사랑방에서 이루어졌다. (수령은 대체로 2~3만냥, 감사는 그 10배를 내면 살 수 있었다. ) 돈으로 벼슬을 산 관리들이 청렴할 리 없었다. 조선 팔도에는 백성을 수탈하고 괴롭히는 탐관오리들로 가득 찼다. 나라는 엉망이었지만, 세도가문은 자신의 배만 두르면 백성들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또한, 세도 가문의 부귀 영화를 계속 누리기 위해 위협이 될 만한 왕족들은 일찌감치 역모로 몰아 죽이기를 서슴지 않았다. 어리고 어리숙한 임금을 골라 세도가문의 딸과 결혼시키고, 외척의 허수아비 노릇을 시켰다. 조선에서 똑똑한 왕족들은 살아남기 힘들었다. 왕족들은 살기 위해서 멍청해지거나 형편없는 인물이 되어야 했다. 왕족들은 살기 위해서 멍청해지거나 형편없는 인물이 되어야 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또한 '안동 김씨'세도 정치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생집을 전전하고, 건달들과 어울리고, 안동 김씨에게 구걸하는 등 철저한 위장 생활을 해야 했다.

결과 2) 탐관오리들은 백성을 착취했고, 분노한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켰다.

세도 정치가 계속되면서 탐관오리의 만행은 더욱 악랄해졌다. 안동 김씨에게 뇌물로 바친 재물을 몇 배, 몇십 배로 보상받기 위해 탐관오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을 수탈했는데, '삼정의 문란'이 대표적인 수탈 방법이다.

전정 : 농사짓는 땅에 매기는 세금. 원래는 1결당 4말을 내는데, 이것저것 다른 이유를 붙여서 무려 1결당 100말까지 늘어났다.

군역 : 군대 가는 대신 내는 세금. 세금을 더 많이 걷기 위해 몇 년 전 돌아가신 시아버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 등에게도 세금을 매겼다.

환곡 : 원래는 가난한 농민을 도와 주기 위해 쌀을 싼 이자에 빌려주는 제도였지만, 정부에서 운영하는 고리대금업으로 변해 버렸다. 강제로 환곡을 넘기고 높은 이자를 책정했으며, 빨리 갚으려 해도 일부러 받지 않는 등 높은 이자로 백성들을 괴롭혔다.

비록 허수아비 왕이었지만, 순조, 헌종, 철종 등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들을 응징하려는 시도를 전혀 안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번번히 세도가문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백성들은 엄청난 세금을 낼 수 없어 땅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도적이 되기도 하고, 탐관오리의 만행에 분노해 관아를 습격하기도 했다. 순조 때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농민 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1862년 철종 때는 한 해 동안 전국에서 37차례의 농민 봉기가 연이어 일어났다. 하지만 '세도가문'도, '탐관오리'도 부정 부패를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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