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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자료>조선시대 정세와 제주 유배인

검피아줌마 2010. 1. 4. 12:39

■ 조선시대 정세와 제주유배인 

   <조선역대 왕 때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1. 왕자의 난

2. 태종 이방원

3. 양영대군

□ 사화에 다하여  

□ 유배자와 관련하여  

   <조선시대 제주유배자를 중심으로>

 

朝鮮時代 政勢와 濟州流配人

1. 왕자의 난

이성계 첫부인 신의왕후 한씨: 6남 2녀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태종), 방연 )

둘째부인 신덕왕후 신천강씨 2남:( 방번, 방석)


*제 1차 왕자의 난

 태조 이성계는 둘째부인 신덕왕후의 둘째아들 방석을 특히 총애하여 한씨부인 신의왕후 4째 방원이 질투를 한다. 신덕왕후는 총명하고 조선을 건국하는데 공을 새웠고 자기가 낳은 자식을 왕으로 계승시키려 하니 방원은 눈치를 채고 신덕왕후 신천강씨가 낳은 두 아들을 죽인다.

2. 태조 이성계 아들 태종 이방원

부인 민씨 원경왕후, 처남 민무구, 민무질, 태종 이방원은 원경왕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잉첩들만 끼고 놀아 원경왕후가 시샘을 하자 민무구, 민무질도 좋은 감정이 아니었다.


3. 태종 이방원의 아들 양영대군

무구, 무질이 상기의 내용을 양영대군에게 하소연 하였다가 1409년 제주도로 유배된다. 이를 민무구 형제의 獄이라고 한다. 1410년 두 형제는 처형된다.


□ 士禍에 대하여

▶ 士禍란?

연산군 시대에 들어서면서 시작된 사화(士禍)란 ·'사림의 禍'·의 준말로서 말 그대로 개혁주체인 사림세력이 화를 입는 것을 말한다.

士林이란?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한 재야사류(在野士類)를 배경으로 형성된 정치세력을 일컫는 용어로 연암 박지원은 ·천하의 공언을 士論사론이라 하고, 당세의 帝日類를 士類사류라 하고, 辭海에 떨치는 의성을 士氣사기라 하고, 군자가 죄 없이 죽음을 士禍라 하고, 講學論道강학논도함을 士林·이라 한다고 했다.


1. 戊午士禍 - 燕山君 시대


1. 癸酉靖難 계유정난

 1453년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지켜달라는 선왕 문종의 부탁을 받은 김종서, 황보인 등의 원로대신들을 살해하고 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 보낸 후 사약을 내려 죽이는데 이를 두고 癸酉靖難이라 한다. 이 난을 계기로 한명회, 신숙주와 같은 난 주도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신세력은 공신을 뜻하는 ·勳훈자에 구세력을 뜻하는 舊구·字를 합성하여 ·勳舊派·훈구파라는 거대한 정치세력이 탄생한다.


2. 조선9대 임금 성종

훈구파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지만 훈구파에 눌려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한다.

그리하여 김종서를 중심으로 젊은 세력을 규합하여 弘文館을 설립하여 勳舊派와 맞설 개혁중심의 士林派를 형성한다. 조선은 이때부터 파벌싸움으로 치닫는 계기가 되고 많은 사화를 일으킨다.

 

3.무오사화(戊午士禍)

▶ 김종직의 조의제문

이 글은 초희 회왕을 빗대 단종을 애도하고 항우를 빗대 왕위찬탈을 비판한 것이다. 癸酉靖難계유정난을 존립명분으로 삼은 훈구파는 이를 史草에 실을 것을 기화로 사림파를 체제 부정 세력으로 몰아붙여 대거 살육하는 이른바 야당탄압을 자행하게 된다. 이로서 사림파는 산산이 흩어져 一敗塗地일패도지를 맛보게 되는데 이 것이 바로 1498년 무오사화이다. 이 士禍는 개혁주체세력의 현장에서 어떻게 패배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대표적인 예다.


4. 甲子士禍 갑자사화의 잔인

연산군의 국정운영은 방만해지고 사치, 향락에 빠져 조정대신들은 왕의 향락을 간청하는 府中派부중파와 왕의의도에 부합하려는 외척 중심의 宮中派궁중파가 대립하게 된다. 이 와중에 대립을 이용하여 사림세력과 훈구파조직을 제거하는 음모가 시작된다.  연산군의 친모 윤씨는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폐위되어 결국 사약을 받는데 주동자들이 의도적으로 들춰냄으로서 결국 연산군으로 하여금 엄청난 살인극을 자행하게 된다. 이를 두고 1504년 甲子士禍라 하는데 그 잔인함은 戊午士禍에 비할 바가 아니다.


5. 中宗時代 - 己卯士禍의 비애

▶ 中宗反正

갑자사화 후 연산군의 폭정이 노골화 되면서 민생이 도탄에 빠지게 된다. 이에 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폐위되고 조선11대 임금인 중종이 왕위에 오른다. 이것이 곧 1506년 중종반정이다. 반정은 전왕의 무능과 실정에 대한 신하들의 반발에 일어난 무력혁명이다. 巍巍蕩蕩외외탕탕이라 ·왕도는 높고 크건만 신하들의 반발하였다·는 것은 이유야 어쩌든 왕도의 논리상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중종반정은 결국 경우에 따라서 신하들이 임금도 갈아치울 수 있다는 선례를 남김으로 1623년 또 한번의 반정인 인조반정을 가능케 한다. 중종이 왕위에 오르지만 훈구파에 밀려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하자 사림파를 조직하여 대항하게 하며 조광조는 무오사화로 유배중인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에게 철저한 도학주의적 실천사상을 수학하고 젊은 나이에 사림파의 영수로 자리 잡아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개혁정치를 펴 나간다.


▶ 中宗實錄

중종실록에는 조광조의 정치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탄핵과 논박을 크게 행하여 조정의 고관들이 주현을 범할 수 없었고, 주현의 관리도 스스로 조심하니 백성들 사이에 근심이 없어지고 조정에도 뇌물을 받는 자가 없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 己卯士禍

조광조 일행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훈구파의 상소를 받아들여 그들을 숙청하게 되는데 이를 1519년 기묘사화라 한다.


5. 明宗時代 - 乙巳士禍의 憤怒분노

조선12대 임금인 인종이 즉위하자 윤임 중심의 대윤파에는 이언적 등의 사림이 많았던 관계로 인종 재위시에는 다시 사림파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인종은 즉위 9개월 만에 죽고 12세 어린 명종이 왕위를 계승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됨에 따라 조정의 실권을 다시 小尹派에게 돌아갔고 小尹坡는 大尹派를 무고하여 제거하게 되는데 이 사건을 두고 1545년 ·乙巳士禍·라 한다.

 

▶ 乙卯倭變을묘왜변

왜구들의 배 7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하여 한때 전라도 일부를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민간인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를 1555년 을묘왜변이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문정황후가 죽자 기세가 등등했던 승려보우도 탄핵을 받고 제주도에 유배된다.


6. 선조시대 - 혁명의 실패

제14대 임금 선조가 들어서면서 개혁주체였던 사림세력은 마침내 정권을 장악한다. 훈구정치가 몰락하고 사림세력의 세상이 왔다. 개혁세력의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데 이는 ·기묘사화·와 특히, 을사사화 이후에 사림학자들은 공포와 위협이 두려워 조용히 살아가는 것만을 다행으로 여기고 누구도 국사를 논하려 하지 않았다. 집권한 사림파들은 송나라 歐陽脩구양수의 붕당관에 따라 당파를 조성한다고 했다.


7. 己丑獄死

율곡이 죽자 중도파 세력들이 동인에 가세하면서 조정은 동인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으나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발생하여 조정은 다시 서인의 손으로 넘어간다. 정여립은 본래 서인이었으나 동인에 합류하여 서인을 비판한다. 그 이유로 서인에게 미움이 집중되고 동인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진안 죽도에서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한다. 조정은 관군을 동원하게 되면서 정여립은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동인은 정여립의 죽음으로 대거 숙청당하는데 이를 두고 1594년 己丑獄死기축사옥이라 한다.

 

8. 光海君시대 - 파당의 행진

군자는 화합하되 사욕을 도모하지 않으며 소인은 사욕을 도모하되 남과 화합하지 못한다. 고 했지만 이제 군자는 없고 소인들만 득실거리는 세상이 왔다. 선조시대 들어서면서 시작된 사림의 분열은 혼란의 극치였고 꼴사납고 더러운 ·바보들의 행진· 그 자체였다. 개혁은 찾아볼 수 없고 남은 것은 파당뿐이네. 동인, 서인과 다시 동인에서 남인 북인으로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대북은 다시 골북과 육북, 중북으로 소북은 탁소북, 청소북으로 공서는 노서, 소서로 노서는 다시 원당, 낙당으로 청서는 한당, 산당으로 남인은 청남, 탁남으로 청서는 다시 한당, 산당에서 노론, 소론으로 갈린다. 서인은 공서 훈서로 갈린다.


그것이 시파, 벽파로 되었다가 영정조의 탕평책을 지나 노론, 소론, 남인으로 이어지며 김씨, 조씨, 권씨의 세도정치의 파탄을 지나 대원군에 와서 붕당은 일단 표면적인 종말을 내린다.


이와 같은 당쟁 분열이 왜 일어났는지 성호 이익의 지적을 찾아보자.

지금 열 사람이 굶주린 사람들이 한 그릇의 밥을 먹는다고 하자 다 먹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왜 싸우느냐고 따지면 언사가 불손했다든지 태도가 건방지다든지 여러 가지로 말할 것이다. 그러나 싸움이 원인은 언사나 태도나 동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밥그릇이 하나라는데 있는 것이다. 만약 열 사람에게 한 상씩 대접한다면 점잖게 잘 먹고 일어날 것이 아니겠는가.


불교는 고려를 망쳤고 유교는 조선을 망쳤고 기독교는 자유당 정권을 망치게 했다. 선조말년에 인목왕후를 통해 영창대군을 보게 되는데 이로써 조정은 당시 세자의 지위에 있던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나뉘게 된다. 대북파는 왕권의 취약성을 은폐하려고 왕권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패륜행위를 일삼게 된다. 영창대군 지지파인 소북파를 몰아내기 위해 1612년 ·김직재의 옥·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역모자로 만들어 제거하는데 이때 진릉군 이태경과 송상인이 제주도로 유배된다.


9. 칠서의 獄

소북파를 몰아낸 대북파는 어리지만 위협적인 존재 영창대군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대북파는 1613년 일곱 명의 서자가 벌인 단순한 강도사건인 임.

 

10. 癸丑禍獄

영창대군 옹립 모의로 교묘하게 꾸며 많은 서인과 남인 세력들을 제거한 뒤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을 폐사한 후 곧 살해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1613년 계축화옥이라 하며 이 과정에서 영창대군을 살해의 부당성을 지적한 정온이 제주도로 유배 오게 된다.


11. 仁祖시대 - 反正과 숙청

▶ 인조반정

왕위를 물려준다는 선조의 교지를 받지 못하고 인목대비의 언문교지로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15대 광해군은 등극하자 곧 자신의 불안정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일련의 왕권강화책을 실시한다. 이 과정에서 왕위를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세력을 대거 제거하고 급기야 인목대비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키자 그 동안 광해군에게 불만을 품고 역모를 도모하고 있던 세력들은 이 사건을 분명으로 무력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이것이 1623년 인조반정이다.


12. 光海君 광해군

처음에 강화도에 유배되었던 광해군은 몇 차례 옮겨 다니면서 15년을 떠돌다가 1637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3년을 거처한다. 제주도에서 비교적 처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데 그가 제주에서 남긴 편지를 보면


바람불고 비가 날려 城머리를 스쳐 가는데

드높은 누대에 짙은 안개만 자욱

창해에 성난 파도소리 어스름에 들려오니

푸른산 스산한 모습 가을도 깊어 돌아가고픈 마음.

왕손초 볼 적마다 괴롭고 나그네 꿈속에서도 한양 땅을 보고 놀라네.

나라의 존망소식도 끊기었으니

물안개 서린 강 외로운 배에서 쉬어나 볼가.(제주적중)


13. 肅宗시대 - 轉換과 對立 - 庚申換局

숙종시대는 당파간 대립이 가장 심했던 시기다. 흉년이 거듭 잇따르는데도 관료들은 당재에 몰두했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상대방을 역모로 몰아 죽이는 일이 빈번하여 자리싸움만 하였다.

제18대 임금 현종이 죽자 송시열은 다시 예론을 들고 나왔고 숙종은 남인의 장자기년설을 지지하여 서인의 대표격인 송시열을 덕원, 웅천 등지로 유배시켜 버리자 서인은 갑자기 세력이 약화되었다. 남인세력이 갑자기 너무 커지자 남인이었던 김석주가 서인과 손을 잡고 1680년에 庚申換局을 일으키면서 싸움은 일단락되고 다시 서인의 집권하게 된다.


14. 己巳換局

숙종은 총애하던 장씨가 아들을 낳자 원자로 책봉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인들은 정비 민씨가 아직 젊어 아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하는 상소를 송시열이 주모가 되어 올리는데 이때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와 죽는다. 이로써 중전 민씨가 폐위되고 장씨가 중전에 올랐으며 원자 균은 세자에 책봉된다. 이어 노론계가 정치를 장악하고 서인은 힘을 상실한다. 이를 두고 1689년 기사환국이라 한다. 중전 민씨 폐위 부당성을 지지하다 제주로 유배 된 사람이 광산김씨 김진구다.


▶ 換局이란?

왕의 정계 대개편 권한인 용사출척권을 통한 정국전환을 뜻하는 것으로 숙종은 이 방법으로 세 번에 걸쳐 정권을 교체하면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그 반대급부로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여 왕권을 강화시켜 나간다.

 

▶ 김석주

그는 숙종의 외척으로 비자금을 담당하였다. 김석주는 남인을 몰아내기 위하여 많은 비자금을 낭비하기도 하였다. 숙종은 15세 어린나이에 즉위하지만 의존할 사람이 없어 호탕하고 결단력 있고 지휘력이 있는 외숙을 의지하였고 그에 김석주는 힘을 입어 정국을 주도 하였다.


15. 換局과 獄司 - 甲戌換局

1694년 노론계의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 복의운동을 전개하자 남인은 이것을 기회로 잡고 그들을 하옥하고 심문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 하지만 당시 숙종은 중전 장씨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었고 반면에 민씨 폐위를 후회하여 오히려 남인들을 축출시킨다.  중전 민씨를 다시 빈으로 복위시키고 동시에 송시열 등의 관작을 복귀시켜 소론계를 등용하여 정국을 꽤하게 되는데 이 사건을 두고 ·甲戌換局·이라 한다. 민씨가 복위되자 희빈 장씨는 빈으로 강등되고 오빠인 희재는 제주도로 유배된다. 장씨가 중전으로 복위하려고 애를 쓰는데 제주에 있는 오빠 희재가 편지를 보낸다. 그 내용 중에는 민씨를 모해하려는 문구가 있어 대신들의 그를 죽여야 한다고 했으나 위기를 모면한다. 하지만 1701년 인헌왕후 민씨가 죽은 뒤 희빈 장씨의 거처인 翠扇堂취선당에서 민씨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어 다시 한번 옥사가 일어난다. 이을 두고 무고의 옥이라 하는데 그 결과 희빈 장씨에게는 사약이 내려지고 희재를 비롯한 궁녀 및 무속인들의 처형된다.


16. 英祖시대 - 蕩平탕평反對- 丁未換局

영조가 소론대신들을 내몰고 노론인사를 등용한 것을 을사처분이라 한다. 정권을 잡은 노론은 신임옥사 때 처단된 노론인사들의 신원을 추진하고 그 보복을 주장 하였지만 영조는 각 정파의 인사를 고르게 등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펴고자 했기 때문에 노론 측의 소론에 대한 정치적 보복을 반대하고 오히려 을사처분 때 파직되었던 소인들을 불러들여 조정에 합류시키는데 이를 1727년 정미환국이라 한다.


17. 正祖시대 - 弑害陰謀시해음모

요절한 영조의 큰아들 진종의 후사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위험한 고비를 여러 번 넘긴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 되었듯이 정조 역시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 세손시절을 지내야 했던 것이다. 그 고난의 시절을 오로지 독서로 충당하다 새벽닭의 홰 쳐야 잠자리에 들만큼 불안에 떨었던 것이다. 조정철은 이때 정조시해 음모와 관련하여 제주도에 유배된다.


18. 純祖시대 - 天主敎 전례 - 신우박해

조선의 천주교는 숙종 이후 거의 정치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남인소장 학자들을 중심으로 지식층에 전파된다.  17세기에도 소현세자나 홍대형 등에 의해 전해져온 천주학 서적들에 대한 연구는 있었지만 종교로 받아들여 정식으로 신자가 생긴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였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승훈 이었으며 다산 정약용 형제들과 이가환, 권철신등 재야 남인 세력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다.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 김씨가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게 됨에 따라 벽파가 정권을 장악함에 따라 남인시파의 세력을 꺾기위해 대공세를 펼쳤고 벽파후견인이었던 정순왕후는 1801년 언문교지를 내려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고 전국의 천주교들을 잡아들인다. 이를 두고 ·신우박해·라 한다.

 

▶ 辛酉迫害란?

인륜을 무시하는 사교를 뿌리 뽑아 나라의 기강과 윤리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아래 정적인 남인 시파와 진보적인 사상가들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숙청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치훈. 정난주가 제주로 유배 온다.


19. 玄宗시대 - 勢道의 對立

순조시대부터 드러난 세도정치의 여파로 민생의 어려움이 그치지 않았다. 정조시대 이후 조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독재를 하기 시작한 데서 변질되어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나 외척들이 독단으로 정권을 휘두르는 것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 세도란?

-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도리 -

세도정권의 특징은 당쟁시대와 달리 견제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세도정치 초기에는 안동김씨와 풍향조씨 일족간에 권력 장악을 위한 대립이 있었는데 이 알력 과정에서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된다.


20. 哲宗시대 - 세도의 專橫전횡

철종시대는 순조시대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결정을 이루던 때였으며 안팎으로 변화가 휘몰아치던 격변기였다. 안으로는 탐관오리들의 전횡으로 민생의 도탄에 빠지고 홍수, 지질, 역질 등으로 농민반란이 나타나던 시기이므로 이양선의 출현과 천주교의 전례로 왕조질서가 흔들리고 있었다. 순원왕후의 강한 후광을 얻어 안동김씨 세력이 판을 치고 순조비인 순원왕후는 손자현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 척족인 풍향조씨 일파가 왕위를 염려하여 현종의 7촌 강화도령 원범으로 하여금 왕통을 잇게 하는 전횡을 저지른다. 철종은 영조 때 제주에 유배되었던 은언군의 손자다.


21. 진주민란

1862년 경상 우병사 白樂莘백낙신이 탐욕과 착취에 시작된다. 민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많은 착취를 한다는 관원으로 소문 나 있었으니 정치는 썩을 만큼 곪아 있었다. 이에 농민봉기군들은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1만 여명 정도가 진주성으로 들어가는데 당황한 백낙신은 환곡과 도결의 폐단을 시정약속을 했으나 농민군을 믿지 않고 아전 몇 명을 죽이고 원한 맺힌 토호집을 불태웠다.

6일간 계속된 진주민란은 23개 면을 휩쓸고 120여 호 집을 파괴하고 원인제공자 백낙신은 貪虐不法罪탐학불법죄라는 죄목으로 전라도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죄질에 비해 너무 약하다 하여 제주도로 이배된다.


22. 高宗시대 - 混亂 그리고 혼란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로 왕권의 약화와 일본 서구 열강의 압박 속에서 고종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고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뒤를 잇게하고 자신의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고종을 대신한 흥선대원군은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사색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 비변사 폐지와 삼군부 부활 등의 국가기구 정비, 재정제도의 정비, 서원철폐 등 각종개혁정책을 폐지하여 국가체제를 재편성 하였다. 이러한 대원군의 실정에 대하여 이항로는 丙寅上疏병인상소를, 최익현은 戊辰上疏무진상소를 올렸다. 특히 1873년 최익현은 대원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癸酉上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로 10년 집정의 대원군의 하야하고 고종의 몸소 정사를 다룸으로써 왕권을 회복한다. 이 상소로 부자간 이간시켰다는 이유로 최익현은 제주도로 유배된다.

고종은 당시에 모든 상황으로 정치를 잘 하여 국가를 이끌어 갔지만 뚜렷한 주관 없이 정사를 돌보다 결국 외세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고 끝내 나라를 뺏기고 만다.


23. 丙子守護條約과 개항과 침투

대원군의 정치에서 물러나고 고종친정이 시작되자 정권은 왕비 민씨의 친족들의 장악하게 된다. 민씨 친족들은 강력한 쇄국정책과는 달리 안으로 개방, 밖으로 운요호사건 이후 무력시위를 하고 있던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강화도에서 ·丙子修護條約·을 맺는다. 개항이후 일본의 정치, 경제침투가 가속화되자 국내에서는 개화파, 수구파 대림이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기 시작 1881년 황준헌이 조선책략을 유입하여 반포한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척사상소운동을 일으켜 민씨정권을 하며 이 척사상소를 두고 萬人疏만인소라고 하는데 이 사건으로 김평묵은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된다.

 

24. 國權危機

조선조정이 배일 친 러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라내고자 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895년 8월 대러 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명성왕후를 시해하고 친일세력으로 하여금 조정을 장악하게 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을미사변 후 신변에 위기를 느낀 고종은 은밀히 러시아와 내통하고 1896년 2월 러시라 영사관으로 몸을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친러 내각이 집권하면서 나라위신이 추락하고 권익을 잃어 국권침해가 심했다. 이에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선양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여론에 밀려 고종은 1897년 2월 환궁하여 국호를 大韓帝國으로 고치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光武라 칭한다.


민비일파의 친러적 세력을 없애고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일본공사 미우라 등이 일으킨 을미사변으로 유길준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내각이 수립된다. 새 내각에서는 모든 방면에 손을 대어 음력폐지, 종두법의시행 등을 급진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민비의 참변과 단발령은 민심을 크게 흔들어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 하였으며 결국 俄館播遷아관파천의 계기를 마련하고 고종은 이를 계기로 친일내각을 제주도에 유배 보낸다. 이들 가운데 정병주와 서주보는 김윤식이 유배를 와서 시회 ·귤원·을 만들자 회원으로 동참하였다. 정병조는 시문에 조예가 깊고 서도에도 매우 능한 학자였다.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세력을 잡게 된 친 러정권에 불만을 갖고 있던 일본의 세력들은 1897년 11월 11일 비밀회합을 갖고 독립협회가 독립문의 기초를 세우는 축하식 날을 계기로 군사쿠데타 일으킬 것을 모이하다 사전에 발각되 이근용, 김낙영, 김사찬, 장윤성, 이용호, 한선회 등이 제주도로 유배된다. 


25. 純宗시대 - 무력강점 - 박영효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 이후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제27대 순종을 임금으로 등극케 한다. 순종은 일본의 압력에 밀려 정치를 하지 못하고 군을 해산당하고 사법권을 강탈당하는 등 숱한 수모를 겪는다. 데라우치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야욕을 드러내자 1909년 10월 이토오가 암살되고 12월 이완용이 습격을 당하는가 하면 1910년 데라우치 암살미수사건이 터진다. 1910년 한일합방을 단행하고 한반도를 무력으로 강점해 버렸다.



▶ 박영효는 고종이 사위로서 1884년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뒤에 귀국하여 김홍집내각에 내무대신이 되었다가 고종폐위 음모로 다시 일본으로 망명, 1907년 귀국하여 용서를 받고 이완용 내각의 궁내대신이 되었으나 대신암살 음모로 체포되어 제주도로 유배된다. 박영효가 유배시에 천주교 제주도 최초의 신부인 라쿠르(具瑪瑟)는 제주도에 학교를 설립하려는 중이었는데 박영효가 도왔다. 제주도 최초 근대여성학교인 晨星女學校의 개교에 큰 역할을 한다. 그 고마움으로 구마슬 신부가 독일의 믜텔신부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밖에도 제주도 유배 중 농촌개몽운동을 폈으며 제주의 원예작물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여 오늘 날 제주도 감귤이 번창하게 되는 절대적 역할을 한 사람이다. 또 신문학에 관심을 갖고 제주사람 고자환을 양자로 삼아 교육을 시켰고 제주사람들에게 개화에 대한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 편지내용

제주도에 있는 라쿠르 신부는 여학교 하나를 얼마 전에 설립하였습니다. 이 일에서 라쿠르 신부는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으며 그 같은 일에 희사를 아끼지 않은 한 비신자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는 선왕의 사위이자 전 영의정으로 정사에 진저리가 나서 스스로 이 섬에 은퇴하여 자기 나름대로 선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 최정숙 그는?

김윤식이 주도했던 사회활동에도 참여하고 박영효와도 교분을 맺은 제주사람 최원순은 딸 최정숙을 신성여학교에 입학시키고 부인을 천주교에 입교시킨다. 최정숙은 신성여학교 1회를 졸업 3.1운동시에는 옥고를 치렀으며 신성여학교가 폐교되자 제주도 여성교육기관의 중흥을 목적으로 女修園을 창설하는가 하면 해방 후 초대 제주도교육감에 오른다.


□ 유배자에 관련하여

1. 이미

益齋亂藁(익재난고, 擽翁稗說(역옹패설) - 고려 말 대학자, 이재현의 증손으로 조선조정 벼슬을 거부하여 태종(이방원)때 제주도에 유배된다.

이미의 李伸은 동생이 마음을 돌리기 위해 제주수령을 간청하여 내려왔지만 이미는 이미 정착생활 중이라 왕족지식인의 신념과 절망을 애뜻하게 보여준다. 형 이신은 이 더러운 곳에 어지 살겠느냐 하면서 올라갈 것을 종용하지만 따르지 않고 글을 쓴다.

바다의 섬 비록 더럽다고 말하지만 이곳도 나라의 영토가 아닐 수 없네

이 마음속에는 옛 임을 우러러볼지언정 두 마음 가진 사람이 되기를 즐기랴.


2. 洪裕孫(홍유손) - 김종직 문하생

두보시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받았고 생육신의 한사람인 남효온과 어울려 산수를 찾아다니며 자유분방 하였다. 김수온, 김시습과 교류하다. 김종직 문하생이라는 이유로 1498년 戊午士禍 때 제주도로 유배와 8년을 머문다. 유배에서 풀려나 76세에 첫 장가들고 아들을 낳았고 99세까지 장수한 멋쟁이 풍류시인이다.


3. 康永(강영) - 신천강씨 신덕왕후 태조 둘째부인 4촌 오빠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강씨의 인척들은 멸족위기에 있자 당시에 강영은 전라감사로 있다가 관직을 박탈당하고 1402년 함덕에 유배된다. 제주에서 소실을 맞아들여 楨(정), 福(복), 萬(만)를 낳고 신천, 곡산강씨의 제주입도조로서 제주계보를 이어간다. 함덕 바닷가에는 강영이 들어온 포구라 하여 ·강영개(康永浦)·가 있다.


▶ 참고 - 소실(첩)

제주도에는 변방이라는 이유로 조선시대에 명사 또는 왕족, 문인들의 많이 유배 왔기 때문에 첩으로 또는 그냥 여자와 혼인 없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유교의 전예로 본다면 첩이란 생각을 못하였을 때지만 제주도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육지와 특히 그것도 명망이 있는 분들의 혼자 와 있으니 딸을 상납형식으로 보내어 관계를 맺고 육지의 정계나 학문 쪽으로 연결을 해보자고 했던 것이다.


4. 金舜孫 김순손

성종이 죽고 영산군은 왕위에 오르지만 연산군은 상중인데도 궁 안에서 말 교미 장면을 보고 선왕, 후궁을 간음하는 등 부도덕한 행동을 하자 내관이던 김순손이 옳지 못한 일이라 직언하자 연산군은 호가 치밀어 충청도 서천으로 유배시켰다가 1496년 제주도 대정현으로 이배되게 된다. 연산군은 제주도 만호에 편입시켜 충군토록 하고 가족까지 제주도로 옮기도록 한다.

5. 洪常 홍상

세조의 요절한 맏아들 의경세자(덕종)이 사위고 성종의 매제로 홍상은 폐비윤씨의 사약을 방관했다는 이유로 1504년 제주도로 유배와 1년 반을 지낸다. 홍상은 유배 와서도 왕도와 관계없이 지냈다고 하지만 낙도의 제주사람들은 그렇지가 안했다. 고도의 중앙집권적 논리로 그를 공손히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6. 柳軒 유헌

 무오사화를 획책한 장본인 유자광과 갑자사화의 장본인 임사홍을 탄핵하고 좌의정이었던 이극균의 억울하게 죽음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1504년 제주도에 유배된다. 그 후 바로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유배에서 풀려 돌아가다가 바다에서 해적을 만나 죽는다. 그는 짧은 기간이지만 제주유생들과 잘 지내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제주유생들은 그의 청아한 인품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7. 金淨 김정

조광조의 핵심세력이었던 한사람으로 기묘사화의 문제로 인하여 1519년 국정에 끌려간 문초를 받을 때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신의 나의 서른넷으로 젊고 고지식하고 성질이 偏僻편벽되고 궁한 대로 6경에 올라 송구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국은에 보답할 길만을 생각했습니다. 그 때문에 정사를 논할 때도 바르게 하려고 걱정했을 뿐 붕당을 지어 과격한 풍습을 이루고 국론을 전도케 한 일은 없었습니다.

김정은 처음에 금산으로 유배되었으나 진도로 옮겨진 후 다시 제주도로 옮겨져 동문 밖 금강사 옛 터에서 1년을 지내다가 왕의 명령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김정은 성질이 급한 편이며 과격하여 조광조 핵심자 중 젊은 편이고 현실정치를 펴다가 끝내 보복 받는다.

 

▶ 김정의 행적

1년을 제주에 있으면서 우도를 구경하고 우도가를 짓고, 목사의 부탁으로 한라산 기우제 제문을 짓고, 적거지 근처에 우물을 파서 위생적인 식수를 먹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학문에도 힘을 기우려 김양필, 문세걸과 같은 걸출한 학자를 배출한다. 김양필은 후에 제주향교를 고치는데 남다른 공헌을 함으로 당대 鄕校의 퇴폐와 교화의 실추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 죽음 앞에서 남긴 김정의 詩 臨絶辭

절지에 와 외로운 넋이 도도다. 멀리 어머니를 두고 가니 천륜도 어겼나니

이 세상 두고 이 목숨 끊어지나 저 세상에 가서 역대상감의 문지기가 되리로다. 또한 굴원을 따라 높게 소리하련만 기니긴 어둔 밤 언제나 아침이 되랴. 일편단심 충정 쑥밭에 파 묻혔고 당당한 장부의 듯 중동에 꺾였으니 오호라 천추만세가 내 슬픔을 알리라.


▶ 橘林書院- 김정, 김상헌, 정온, 송인수, 송시열 五賢

1578년 김정의 슬픔을 달래기 위하여 ·橘林書院·을 지었는데 김정은 첫 번째 배향유현이 된다. 서원은 국가공인의 사액서원으로 200여 년을 제주도 교육진흥에 기여하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거하여 문을 닫는다. 지금의 五賢壇이다.

▶ 배향 - 학덕이 있는 사람으로 서원에 향배하러 가면 그 사람을 보는 듯하여 다음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처럼 되도록 감동하여 분발하게 하려는 교육적 의미인 것이다.


▶ 栗谷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조광조는 유능한 사람인데 너무 일찍 정치에 입문하여 그의 학문을 펴보지도 못하고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아쉬워했다. 改개 - 改革의 改字

자기에게 회초리를 든다는 합성어이며 그것도 가죽 회초리이다.

 

▶ 濟州風土錄

김정은 제주에 짧은 기간 머물면서 제주에 관한 풍토지라고 할 수 있는 이 기록에 제주의 기후, 가옥, 풍토, 신앙, 관원의 횡포, 토지, 동물과 조류, 토산물에 대한 설명 그리고 유배생활에 대한 소감 등 다양한 내용을 기록하여 조카에게 보냈다.

 

▶ 金淨의 冲庵集

제주의 풍속의 잡신을 숭상하고 예법을 모르므로 공이 초상, 장사, 제사에 대한 의식을 기술하여 백성을 지도하니 풍속이 크게 변화하였다라고 쓰지만 어떻게 보면 제주도 사람들을 무시하는 글이다.


유희는 사한수를 읊는데

제주 섬은 언제나 그늘져 있고, 거친 마을엔 온종일 바람만 가득

봄을 알고 꽃은 스스로 피는데, 밤이 깊어가자 하늘엔 달만 둥실

천리 밖 이억에서 고향 그리워, 왕래 드문 고도에서 남은 목숨 이어가니

하늘은 이미 운수를 정해 놓았을 텐데, 막다른 길에서 울어 무엇 하리.


8. 李世蕃 - 고부이씨 입도조

이세번은 조선 5현 가운데 한사람으로 김굉필의 문하생이다. 조광조가 투옥되자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무죄를 호소하다 1522년 제주도에 유배된다. 이세번은 거친 풍랑으로 인하여 신도포구로 들어와 대정현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제주에 7년을 머물며 많은 후학을 양성했으며 그들은 후일 높은 벼슬에 오른다. 7년 되는 해에 큰 병을 얻어 죽게 되자 제자들의 가족에게 연락하여 부인 황씨와 두 아들이 내려와 그가 죽자 가족들은 제주에 정착한다. 이세번은 고부이씨 입도조가 되었다.


인종 때에 들어 이세번은 조광조, 김정과 함께 복권되어 특히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 유생으로 수학 중이던 아들 충현이 제주교수로 천거되었고 후손들은 대대로 대정향교 훈도가 되었다.

이재수 - 이세번의 12대 후손  이승진(김달삼)도 그의 후손이다.


9. 柳希春 유희춘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대윤파로 지목된 그는 1547년 제주도로 유배되고 후일 종성으로 옮겨진다. 제주유배는 19년으로 문정왕후가 죽고 다시 등용되자 김굉필이 문하에서 공부하며 조광조와 함께 道統도통의 한 서열을 점하고 있는 사람이 김안국인데 유희춘은 김안국의 初傳, 즉 1대 제자이다.


10. 李希孫 이희손

을묘사변 당시 전라도 강진을 책임 맡던 이희손은  패전의 책임으로 제주도에 유매 군역에 종사한다. 왜구가 이듬해 화북을 점령하여 불사르자 이희손은 제주도사람들과 협력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려 유배형이 면제되고 서울의 도성을 수비하는 책임자로 영전한다.


▶ 임진왜란

왜구들은 한국을 종종 노략질의 대상으로 삼다가 결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시키면서 왜구는 단순한 노략질을 벗어나 대규모 감행을 저지른다. 이것이 곧 1592년 임진왜란이다.


11. 승려 普雨 보우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 신봉자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병조판서에 앉히는 등 해괴한 인사를 행하기도 했고 보우를 都大禪師도대선사 주지로 올려놓기도 했다. 문정왕후가 죽자 승려보우는 유림들의 탄핵을 받아 병조판서에서 밀려나고 승직을 박탈당해 제주에 유배 후 비참하게 죽는다.

 

▶ 제주에서 남긴 詩

꿈에 취한 듯 꿈속에 사는 세상에 와서

50년을 실없이 미쳐 날뛰었네.

인간의 영예와 욕된 일을 다해 보았으나

중의 탈을 벗고 높고 높은 데나 오르련다.


12. 李弘老 이홍로

왕비박씨가 죽은 후 계비를 받아들인 선조는 영창대군을 보게 된다. 이에 소북파에서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을 것을 꽤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죽게 됨으로 광해군을 밀던 대북파가 정권을 잡고 소북파를 몰아내는데 이때 이홍로는 1608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612년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된다. 권력투쟁의 분파과정에서 죽음을 당하게 된다.


13. 정온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역모자로 만들어 강화도에 유배시킬 때부터 강력하게 반대했던 동계 정온은 결국 영창대군의 살해되자 그것을 주도한 강화부사 강항을 문책 할 것과 영창을 대군의 예로서 장례를 지내고 사후 추중하는 은혜를 상소하다가 광해군의 미움으로 1614년 제주도로 유배된다.

정온은 광해군 시대에 주름잡던 대북의 영수인 정인홍의 제자였다,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1636년 병자호란 때 화의를 적극 반대하였다가 화의가 성립됨에 분하여 할복자살을 도모한 점 등에서 볼 수 있는 강하고 굳센 기상인 소유자였다. 정인홍이 제자이기는 하나 스승의 스승답지 못하니 그를 잘 판단할 줄 알고 나중에 배반하여 남인이 된다. 제주도로 올 때는 많은 양이 책을 갖고 와 독서로 일과를 보냈고 대정현감 김정원의 적소를 경내에 서재용으로 두 칸의 집을 지어주므로 그 곳에서 유생들을 가리키며 송상인, 이익과 어울려 시문을 교류하고 대정사람들에게 예를 가리켜 어려운 일을 해결하기까지 하였다. 정온의 문집인 ·棟溪集동계집·이 있다.


14. 金悌男의 부인 盧씨

癸丑禍獄의 원인인 칠서의 옥 취조과정에서 인목왕후와 아버지 김제남이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능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했던 일이 발각됨에 따라 김제남이 처형되고 영창대군의 강화도에 유배된다. 이 일로 김제남의 부인이며 인목왕후의 어머니인 노씨는 1618년 10월 제주에 유배된다. 노씨 제주도 유배는 여자로서는 최초였다. 제주도에서 생계를 꾸리기 위해 술을 빚었고 이 술을 ·모주·라 하여 적거지의 주인인 전랑을 비롯하여 여러 제주도 사람들이 노씨를 도왔다. 노씨는 제주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고 전한다. 제주목사 양만호는 대북파의 눈에 들기 위해 그녀를 몹시 괴롭혔다. 그는 역대 포악한 지방관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술장사 한다고 농간까지 일삼았다. 인조반정으로 5년여 만에 유배에서 풀려 돌아가게 되면서 노씨를 괴롭혔던 양만호는 처형된다. 한편 노씨를 도왔던 집주인 전씨는 서울로 동행하여 첨사라는 무관벼슬을 받게 된다.


15. 艮翁 李翼 간옹 이익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한 죄로 제주에 유배온 간옹 이기온 이황의 수제자인 정구와 절친했던 사이로 영남학파의 전통을 계승하는 지식인이었다. 특히 이익은 제주에서 많은 유생들을 가르치는데 김진용, 고홍진, 문영준 외에도 걸출한 문하생들의 많았으며 제주도 문교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 그는 은둔한 심정으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제주의 헌마공신 김만일의 딸을 소실로 삼았다가 5년 후에 떠난다. 이로써 그는 경주이씨 菊堂公派 입도조가 된다.


16. 이건목사

인조 때 유배 왔던 이건은 그의 ·濟州風土記·에서 김만일의 말은 많아서 수천 필에 이르러 불가기수다. 신관의 입거할 때마다 만일로부터 징하여 3년 간 소중히 사양하고 습재하였다가 체귀시에 임하여 진헌한다. 만일이 뛰어난 마축 개량기술을 이건은 만일은 절종을 걱정하여 준마로 취해 감직할 것을 택하여 일부러 그 눈에 상처를 내어 봉사가 되게 하거나 혹은 가죽과 귀를 째어서 병신마를 만들어 이것을 잘 보존하여 종마로 취급하였다고 한다.


제주도에 형성된 이익의 가계는 오라동을 중심으로 제주도 문교발전에 남다른 공헌을 하였는데 중손인 이중발과 고손인 이수근은 정시에 급제하는가 하면 구한말의 이기온과 그의 아들 이응호는 당대 제주유림을 대표하는 강골들이다. 특히 이기온은 척사위정의 거두 최익현의 제주에 유배오자 그와 사제의 인연을 맺으며 이응호는 또 다른 척사 기정진과 인연을 맺고 集義 契를 결성하는 등 가계로부터 계승된 지식인의 비판주의적 태도를 올곧게 보여 제주도청 앞에 있는 ·文淵社·는 원래 이기온에게 교육을 받아 은혜를 입은 광산김씨와 제주고씨 문중에서 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제사지내던 곳이다.


▶ 이익의 배출한 김진용

그는 광산의 본으로 호는 명도암이며 지금도 봉개동에는 그의 호를 딴 명도암이란 마을이 있으며 사마시에 급제하고 이어 성균관에 진학하여 참봉으로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제주도에 돌아와 훈학에 전념하였던 당대 제주 유림의 거물로 후일 향현으로 추대된다.


▶ 그는 한라산에 올라가

영주산 제일봉에 홀로서니 하늘을 보고 바다를 바라보니 아득하여 형용키 어렵네. 성역에서 황홀히 놀다 앞뒤를 바라보니 동산에 올라보고 노나라가 작다는 것을 이제 믿겠네.


17. 김응주 - 김해김씨 四君派 입도조

그는 어떤 연유로 제주에 유배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광해군 시대에 당쟁에 연류 된 것만은 분명하다. 제주에 유배 왔을 때 그와 항열이 같은 김완의 아들 해미 현감에서 제주목사로 부임했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김완의 아들 김여수는 제주목사로 2년 간 재직 중에 紅花閣을 고치고 학문을 장려하는 등 백성들을 잘 다스렸던 목민관인데 이 기간에 친척이 되는 김응주가 유배를 오자 그를 도왔던 것이다. 김응주는 소실을 도와 ·김해김씨 四君派의 입도조·로서 자손을 낳고 살다가 유배가 풀리자 돌아간다.


18. 朴承祖 - 密陽朴氏 규정공파 입도조

인조반정의 성공하고 영의정이었던 박승종은 신변에 닥칠 위험을 감지하고 경기도 관찰사였던 아들과 함께 선영에서 자결을 택하고 동생인 박승조는 제주에 유배된다. 박승종은 이이첨, 유희분과 함께 고산 윤선도가 병진소에서 통렬하게 탄핵했던 광해군 때의 3대 세도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형 박승종의 죽음을 목격하고 유배 길에 오른 박승조는 막내아들 박자호를 데리고 제주도 곽지에 10여 년을 머무른다. 1636년 유배에서 풀려 박승조는 돌아가지만 아들 박자호는 제주에 정착하여 밀양박씨 糾正公派귭정공파 입도조가 된다.


19. 李德仁 이덕인

왕족이었던 그는 인조반정 당시 심기원을 요직에 추천하여 반정공신으로 좌의정까지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심기원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일원. 권억 등과 결탁하여 이덕인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정권을 쟁취하고자 계획을 꾸민다. 이 사건의 발각되면서 이덕인은 제주 유배 길에 오르는 것이다.


▶ 李彭馨 이팽형 - 全州李氏 桂成君派

이팽형은 이덕인의 서자이다. 조선의 당시 정치에 회의를 품고 21세에 1592년 제주도로 들어와 지금의 제주시 이도동에서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살다 30세 젊은 나이에 돌아갔다. 임윤회라는 제주도 여자 사이에 아들 이득춘을 낳아 ·전주이씨 계성군파 ·입도조가 되었다.  


20. 申命奎. 李鼎基 신명규. 이정기

이들은 효종의 능을 만드는 과정에서 석축책임자였다. 그런데 비만 내리면 매년 석축을 다시 수리해야 할 만큼 부실공사를 하여 남인들에게 탄핵을 받는다. 사형직전 1673년 신명규는 대정현으로 이정기는 정의현으로 유배된다. 신명규는 예래동에 있는 이애길에 집에 적소를 두어 제주인 오정빈에 문하에 둔다. 이때 제주도 인정과 풍속, 견문 등을 기록한 黙齊記聞錄을 남긴다. 1680년 6월 신명규는 아들 신임의 상소로 진도로 옮겼고 1683년 석방되어 입궐하게 된다.  이대 이정기도 석방된다.


신명규가 천제연 폭포를 구경하고 난 소감문을 살펴보자

백록담의 물의 㑀流태류하여 여기에 이르러 흘러 떨어져 폭포가 되었다. 그 높이가 수십 척으로 된 세 계단의 폭포가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구나. 비단결과 같은 기려한 淸流와 넓은 돌로 된 淵池연지의 영롱하면서 기괴하고 현란하면서 요지함과 淵池연지의 좌우에 깎아지른 듯한 푸른절벽, 崖谷간에 平舖된 청적색의 광석, 그 어느 것이나 특이하고 아름답고 유수한 풍치 아닌 것이 없구나. 또 연의 서안에는 봄에는 철쭉꽃과 영산홍이 피고 겨울에는 춘백과 두견화가 난만하여 폭포와 푸른 파도 사이에 隱映하니 마치 붉은 휘장을 두른 듯하며 가을에는 수만 가지의 나무에 단풍이 들어 도한 청파에 비치오니 그 아름다움이 진실로 천하의 결정이랴.


21. 李枝達 이지달의 아들 이시호 遂安李氏 입도조

이지달의 제주유배과정은 확실하지 않다. 현종때 서인과 남인간에 벌어졌던 예송(예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논쟁의 전개과정에서 연류되어 왔을 것이라는 것이다. 제주도 감산에 유배 올 때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 아들의 이시호가 제주도 오씨 가문의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수안이씨의 제주입도조가 되지만 이지달의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아들도 동반함으로써 오씨부인은 슬하에 자식과 함께 제주에 남는다.


▶ 位俚安治 위리안치

유배 자가 중죄를 짓고 죄명이 위리안치일 경우는 홀로 유배지로 떠나고 그러지 않을 시에는 가족동반이 가능하였다.

위리안치란 한정된 장소를 벗어나지 못하는 죄목이며 보통 집 울타리를 한정하고 있다.


22. 宋時烈 송시열

조선중기 성리학의 큰 인물이며 노론의 최고 지도자였다. 80평생을 치열한 당쟁 속에 휘말려 살았으며 같은 노론계의 소장파와 간격을 깊게 하여 서인 내부의 노론, 소론의 분열을 초래케 하였으며 그의 분투로 노론의 우세로 굳어진다. 그러던 그가 1689년 83세 때 ·己巳換局·으로 제주로 유배 되는데 그는 동문인 권상하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맏손자를 데리고 제주에 갇힌 채 날마다 ·朱子大典綱目주자대전강목·, ·易學啓蒙역학계몽· 등을 읽으면서 세월을 보낸다. 비록 100여 일 정도 제주에 머물지만 제주도 유생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다. 산지골 유계득의 집에 머물다 국문을 받기위해 상경도중 남인의 척동으로 정읍에서 사사된다. 그는 공자의 중심철학에 철저했으며 조광조, 이이, 김장생으로 전수되는 도학과 예학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제주도와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제자는 김만기와 임홍망이 있다. 김만기 아들 김진구 그 손자 김춘택 또한 김진구의 사위 임징하(임홍망의 손자) 등 제주유배자였다. 그러니까 송시열의 학문은 그들 손자까지 제주로 유배되면서 의 더욱 넓게 유포될 수 있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송시열이 복원 되자마자 제주도 유생 김성우가 상소하여 귤림서원에 송시열을 배향하게 된다. 이 때 상소문은 김춘택이 썼다. 오현단 서쪽 암벽에 새겨진 ·증주벽립·이라는 큰 글씨는 송시열이 필적이다.


23. 金鎭龜 김진구 - 光山人

숙종의 부인 중전 민씨가 폐위되자 잘못을 상소하다 1689년 39세 나이로 제주로 유배되었다. (박태보 등 86인의 상소문) 제주시 가락천(오현단 아래 가락쿳) 오진의 집에 적소를 마련하고 이증발, 오정빈, 고만첨, 김덕항, 고사선, 양수영, 백희민과 같은 굵직한 제주출신 제자를 배출하였다. 그는 제주도에 ·경사학풍·을 전수시킴으로서 제주도의 학문적 분위기를 일신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 제자 중 이증발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한 이유로 유배 되었던 이익의 후손인데 비슷한 이유로 유배된 김진구에게 가르침을 받았음은 우연치고는 특이한 예다.  오정빈은 현종 때 유배되었던 신명규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이다.


24. 金礼寶 김예보 - 김해김씨 褱毅公회의공 金景瑞派

임진난 때 명장 김경서의 손자인 김예보는 己巳換局으로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곧이어 유배가 풀렸지만 중앙정치에 환멸을 느껴 제주에 정착하면서 김경서파 입도조가 된다. 제주에 머물며 많은 유생들을 가르친다.


25. 吳始復 오시복

그는 무고의 옥에 관련되어 투옥되었다가 1702년 대정현으로 유배되어 10년을 지내게 된다. 이때 이형상 목사가 돌봐주었는데 대사간 이건명의 탄핵을 받아 파직된다. 이형상 목사는 도내에 당과 절을 불태운 일로 유명한데 ·南宦博物. 耽羅啓錄· 등을 집필했으며 화공을 시켜 당시 사정을 45매의 그림으로 그린 ·耽羅巡歷圖·를 남겼다. 이건명은 경종 때 신임사화로 죽어간 노론 4대신 가운데 한 사람이다.


26. 金春澤 김춘택 - 光山人 金鎭龜의 子

폐비 민시 복위운동을 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복위는 실현 시지만 장희재(장희빈 오빠)의 무고한 편지에 얽힌다. 장희재는 김춘택이자기 처와 치정관계를 맺었을 뿐 아니라 모해 하려 한다는 내용이 거짓 편지였다. 김춘택은 중상모략이라고 부정하지만 1706년 끝내 제주목에 유배되고 가족들 역시 제주도 정의현에 유배된다. 김춘택은 그의 부친 김진구가 머물던 오진의 집에 적소 하였는데 마침 순무어사 이해조가 과거를 베풀자 그의 부친에게서 수학했던 사람들이 대거 급제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그는 자신의 유배생활 중 모든 물산이 빈곤한 지방이었지만 ·橘林書院·에는 유생과 지방자제들이 모여와서 독서와 음시를 하고 그들과 벗하여 시서로서 즐겁게 지냈다고 기록한다.


그의 시 書懷에서

나그네 자주 바뀌는 계절의 질서에 놀라며

귀양살이 삼년에 크게 거칠어져만 갈뿐

거울 속 백발에도 봄은 오건만

청등아래 섣달 그믐밤 지내던 일들 

남해의 풍파는 그칠 날이 없구나.

고향의 꽃들은 누굴 위해 피었는가.

橘林의 솜씨 좋은 사람들과 계림의 이씨랑

지난 감회 새 수심 한잔 술로 달래네.


김춘택은 곧 적소를 대정으로 옮기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역모를 모의 한다는 제주도 사람 박의낭의 모함 때문이었다. 비록 나중에 무고로 밝혀지지만 그는 적소를 옮겨야 했고 1725년 대정현 감산리에 그의 매제인 임징하가 유배됨에 따라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게 된다. 특히 이 기간에 김춘택은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에 답하는 별사미인곡을 창작하는 열의를 보인다. 김춘택은 일생을 유배지에서 보냈고 그는 5차례에 걸쳐 30여 년 간이나 감옥 또는 유배 생황을 하였고 그 중 두 번은 제주도에서 보냈는데 모두 6년이었다.


▶ 그리고 그의 시 暮春漫吟모춘만음에서

유형수 봄이 되니 집 생각에 괴롭고

봄 돌아와 어찌 나그네 설움 더 하겠는가.

술 깨고 꿈 깨면 남은 일 없을 터인 걸

눈 예쁜 아이나 시켜 떨어진 꽃 주우련다.


27. 任徵夏 임징하

노론의 임징하는 탕평책을 반대하고 소론 탄핵을 주장하면서 경종의 부덕함을 지적한 결과 영조의 분노를 사 처음에는 순안에 유배되었다가 1727년 제주도 안덕면 감산리로 옮긴다. 제주목사를 지낸 임흥망이 손자로 제주사람들에게 대우를 받았고 임흥망은 송시열의 제자로 숙종때 제주목사를 지내며 불필요한 세금을 없애고 향교에 많은 공을 세워 선정관으로 칭송을 받았던 목사였다. 임징하는 숙종 때 희빈장씨를 반대하는 상소에 연루하여 유배되었던 김진구의 사위로 고영제라는 제주사람의 집을 적소에 두어 그 지방 제자를 가르치고 장인의 제자인 김덕항과 친교를 나누었다. 숙종 때 장희재의 편지에 연루되어 제주 유배 길에 오른 김춘택과 처남매부간으로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기도 하였다.


▶ 죽을 감 잡고 시를 남긴다.

성현의 글을 읽어 배우는 바가 무엇이겠느냐.

하늘을 우러르나 땅을 보나 부Rm러움이 없게 함이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누구가 아니 죽었느냐.

귤림이 곁에 있으니 오랜 세상을 기다려 보세.

슬프다, 제자들이여. 나의 일을 가지고 경계치 말며

문 닫고 독서 부지런히 하여 게으름이 없도록 하라.


28. 趙貞喆 조정철

그는 1777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도내의 이곳저곳으로 옮겨 지내다가 1805년 나주로 옮겨져 1810년에 풀려나기까지 무려 33년의 유배생활을 한다. 조정철은 신임옥사 때 사사된 노론4대신 가운데 한사람인 우의정 조태채의 증손으로 그의 집안은 3대에 걸쳐 4차례나 제주도 유배를 경험한다. 조부 조승빈은 1723년 신임옥사로 정의현에 동생 조관빈은 1731년 신임사화의 전말을 상소하다가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조정철의 부친 조영순도 1754년 탕평책에 연류 되어 제주목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 50년 사이에 한집에 4사람이 제주도 유배 맛을 본 것이다.

정조를 시해하고 이복동생을 옹립하려 하다 탄로나 참형에 처해졌지만 우의정 조태채의 증손임이 참작되어 1777년 제주에 와서 신호의 집에 적거한다. 조정철은 제주도 여자 홍윤애하고 사랑에 빠졌고 유배인의 변방에 미천한 여자로서 비록 그들은 보잘 것 없는 삶을 영위하지만 살기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은 정말 아름답다. 그러나 1871년 조정철의 집안과는 이미 할아버지 때부터 불구대천의 원수지가이었던 소론파의 김시구가 목사로 부임하면서 그들의 사랑은 위기를 맞게 된다. 김시구 목사는 조정철을 죽이기위해 부정을 캐려는 차 여자가 드나드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를 잡아다 문초하였지만 그는 모든 사실을 부인하였고 죽음으로 끝내 조정철을 지킨다. 여러 차례 죽음을 피하여 1782년에 정의현 김윤재. 김응귀의 집으로 적거를 옮기게 된다. 1788년 나주로 옮겨 1805년 유배가 풀리고 1809년 관직에 등용 1811년 제주목사가 되어 한맺힌 제주를 다시 찾아온다. 오자마자 그를 위해 죽어간 홍윤애의 혼을 달래고, 딸도 만나보게 되는데 그가 제주목사가 된 것도 그녀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여서라 한다. 지금도 애월읍 금덕리 홍윤애 묘에는 그 비가 세워져 있다.


▶ 조정철의 홍윤애를 위해 쓴 비문의 내용

옥 같던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 할 수 있으리.

황천길은 멀고먼데 누굴 의지해서 돌아갔는가.

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이 이어졌네.


 

조정철은 유배생활 중에 쓴 시가 제주의 풍토, 풍속, 기후, 산물 등이 실려 있다.

잠은 어이 더디고 밤은 왜 이리 길꼬

하늘가 기러기 소리 애간장을 끊네

만사가 이제 텅 비어 백발과 같아

쪽ㅈ겨난 신하의 눈물 천리를 가네.


29. 李致熏 이치훈

이승훈의 동생 이치훈은 辛酉迫害로 제주에 유배된다. 이승훈은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 영세자로 베드로였다. 이벽을 만나 천주교에 심취, 서장관인 부친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예수회의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해 교리 서적과 십자고상을 가지고 귀국, 김범우 집을 교회로 삼고, 가성직 제도를 채택, 사제 대행 권자로서 주일 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당국에 발각되자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하고 척사문을 공포하였으나, 복교하여 자치적으로 교회활동을 개시, 자신의 직접 주교가 되어 성사를 집행하였다.

1789년 평택현감에 등용되었는데 이듬해 가성직 제도와 자치운동은 위법이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철폐해야 한다는 파리 외방전 교회의 회신을 받고, 그는 제사 문제로 두 번째로 배교한다. 그 후 다시 교회로 돌아왔으나 서학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박탈당하고 투옥된다. 다시 석방 되었다가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밀입국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인이 되었다. 이듬해 주문모를 맞아들인 죄로 그는 예산에 유배 되었다가 1801년 신우박해로 의금부에서 취조를 받고 서소문 밖 형장에서 사형을 당한다.  1866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가 순교한데 이어 1871년 증손 연구. 균구가 순교함으로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집안이 되었다. 신우박해의 여파는 이승훈의 동생 이치훈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결국 그로 인해 제주도에 유배를 오게 되었다. 이치훈의 천주교 신자였는지는 알 길 없지만 형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30. 丁蘭珠 정난주

정난주는 황사영백서사건 장본인인 황사영부인이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알렉산드르 교명으로 영세를 받은 그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군 봉양면 베론이라는 토기 만드는 천주교도의 마을로 숨어 그곳에서 그는 황심. 옥천희라는 열렬한 신자와 연락이 닿아 위기에 놓인 조선 교회를 구출하는 방책을 상의한다. 그들은 조선교회의 박해받은 사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교회의 재건책을 호소하는 길이 62cm 되는 흰 명주 비단에다 한 줄에 110자씩 121행. 도합 1만 3천여 자를 검은 먹으로 깨알같이 쓴 긴 편지를 10월에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끼여서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나 관헌에게 적발되어 황사영은 처형되고 어머니는 거제도에, 처인 정난주는 제주도 대정에, 아들 은 추자도에 각각 유배된다.


정난주는 정낙현의 딸로서 숙부인 정낙전. 정약종. 정약용은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37년 동안 관노로 제주도 대정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죽었는데 서울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31. 金正喜 김정희

김정희는 북학파 박제가를 첫 스승으로 모시면서 실학의 학문을 다지고 연경방면으로 청나라 학문을 계승 약관의 나이에 몸소 실사구시 학파의 원류로서 두각을 나타낸 조선 후기 큰 인물이다. 그는 안동김씨의 정치극으로 자행된 1840년 윤상도 옥사가 재론 되 평탄하게 벼슬길을 걷다가 이 사건으로 55세 때 대정으로 유배되어 종신 무기수로 9년을 지내게 된다.


김정희의 유배생활은 후일 그의 학문을 잇고 ·阮堂集완당집·을 편찬하였고 두 차례 제주를 방문한 내종사촌 민규호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소개한다.


귀양사는 집에 머무르니 멀거나 가까운 데로부터 책을 짊어지고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장날같이 몰려들어서 겨우 몇 달 동안에 인문이 크게 개발되어 문체 나는 아름다움은 서울풍이 있게 되었다. 곧 탐라의 거친 풍속을 깨우친 것은 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이 김정희의 유배는 제주도 지식인들에게 자극이 되었다. 제주사람을 가르치면서 실학이라는 새로운 교육내용을 소개하면서 여러 제자들을 두개 된다. 특히 그 가운데 篆刻전각운동 같은 것은 제주특유의 계보를 형성할 정도의 생명력이 있는 운동이었다. 제주인 김구오에게 계승되었고 이어 김구오의 아들인 우제가 전통을 이었고 우제의 아들 의남이 가법을 따랐다. 그가 제주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것은 덕행과 학문이 제주사람에게 표솔 되기에 충분했고 교육적 관심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제자들에게 온화하였고 늘 칭송으로 학문을 배우게 하여 친화감을 줌으로서 제자들은 언제나 북적거렸다. 윱중인데도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제자 이상적이 도움이 컸다. 이상적은 초인적 노력으로 중국에서까지 구해서 제주로 전하는데 이런 제자의 감동한 김정희는 송백 네 그루가 서 있는 적거의 풍경을 그려 ·歲寒圖·라고 칭하고 題跋제발을 쓰고 제자의 신의에 감사의 뜻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당시 제주목사로 있던 이원조 목사와의 ·古文尙書· 위작 논쟁이 그 대표적인 예다.

제주도에 있는 동안 대흥사에 있던 초의선사가 죽로차와 키우던 차나무를 보내줘서 그 차나무를 키우고 차를 마시며 울분을 누르고 서도에 정진하였다. 이때 추사가 초의 선사의 차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반야심경 한 질을 써서 보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으며 서고의 정진으로 완성을 본 것이 ·秋史體·이다. 그러니까 추사체는 제주도 유배산물이 결정적인 셈이다. 늘 부인에게 미안해하면서 구구절절의 애통한 편지를 쓰는데 부인이 죽었는데도 모르고 27일 지났는데 연락이 없어 편지를 썼다고 한다. 김정희는 첫 부인 한산이씨를 21세에 잃고 후취로 예안 이씨를 맞이하여 금술이 엄청 좋았다 전하며 본인 유배기간동안 남편대신 집안을 맡아줌에 미안해하여 구구절절한 편지를 썼다고 한다.


32. 崔益鉉 최익현

최익현은 14세 때 화서 이항로 문하생이다. 이항로는 한말의 대유학자로 유림들에게 존경을 받던 사람으로 성리학의 명본론과 尊王攘夷종왕야이의 春秋義理춘추의리를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최익현 사상은 척사위정의 바탕일 수밖에 없으며 구국항일운동으로 승화될 수밖에 없다.

1873년 대원군 폭정을 노골적으로 비판하여 ·癸酉上疏계유상소·를 올려 대원군을 하야시키지만 부자간 이간으로 제주도로 유배와 1년 3개월을 보낸다. 제주에 와서 칠성통 윤규환의 집을 적소로 정하고 특히 송시열의 글에 깊이 빠졌는데, 제주향교에 간직된 ·尤菴集규암집·을 빌려 깊이 몰두하면서 송시열의 공로가 중국의 우왕보다 월등하다고 찬양하였다. 그러면서 밖으로는 한라산에 매료되어 한라산 유람을 하는데 1875년 3월 27일 청장년 10명, 하수인 5,6명을 데리고 이기온이 길 안내를 하였다.


▶ 최익현 한라산 등정길

제주시 남문에서 연동으로 訪仙門에 이르러서는 이미 돌에 새겨져 있는 암각(磨崖銘)을 보고 최익현도 ·訪仙門방선문과 登瀛邱등영구·라는 6자를 새기기도 하였다. 동으로 10리를 가니 竹城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산천단을 거쳐 관음사에서 20리를 더 가니 중산(지금의 개미등)에 다달아 다시 20리를 가니 계곡이 있고 봉화를 올려다는 곳에 다다랐다. 정상 동능으로 내려 영실위에 하루를 머물고 10리를 걸어 내리니 영실에 다다랐다. 어디에서 어떻게 머문 것은 자세하게 기록이 없다. 그리고 마애명 6자도 다른 해석으로 하기도 한다.


길 안내를 맡은 이기온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다 유배 왔던 이익의 후손이다. 최익현과 이익의 만남을 기리는 유적으로 ·文淵社·가 있는데 1931년에 만들어진 이곳은 최익현과 이기온을 추모하여 매년 정월 중순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제주시 오라리 2951번지에 소재하고 있었지만 1977년 도시계획으로 이전되었다. 최익현의 직접 식수한 나무가 옛 북군청 앞에 고목을 이루고 있으며 이기온의 최익현을 사모하여 돌에 새긴 ·師長樹抱旦拜사장수포단배·라는 글이 지금도 남아있다.


최익현의 위정척사 정신은 이기온 아들인 이응호에게 이어져 제주항일 비밀결사체인 ·集義契집의계·를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좌겸, 김병로, 김병구, 김이중, 서병수, 고석구, 김석익, 강철호, 강석중, 임계숙, 김기수, 등 12명이 의기투합했던 단체로 외세의 도전에 의해 조성된 주체성이 위기에 대한 대응 문제로 모색했던 당대 제주도 지식인들의 모임이다. 또한 최익현은 제주도 의병운동을 촉발시킨 계기를 마련한다. 제주 의병운동은 제주에서 해배된 최익현이 태인에서 거병하여 전라도 지방을 휩쓸다가 순창에서 일군에게 잡혀 대마도에 끌려가 분사한 최익현의 순국과 고종의 퇴위 그리고 군대 해산 소식에 자극을 받아 제주 지식인들의 1908년 일으킨 운동이다.


33. 남강 李昇薰 - 105인 사건

1910년 12월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시공식에 참석하는 것을 기회로 그를 암살하기로 했던 안명근이 밀고로 체포되어 이를 구실로 600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검거되고 1912년 대표적인 인물 105명이 기소되는데 이를 두고 105인 사건이라 한다.


도산 안창호의 독립협회 활동에 큰 감명을 받고 정주에 五山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과 민족독립에 일생을 바치고자 했던 남강 이승훈도 1911년 5월 신민회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05인 사건으로 서울로 송치되어 4년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다. 제주에 있을 때 적거했던 집은 현재 조천리에 잘 보존되어 있다.


민족교육의 산 증인이었던 이승훈의 제주유배 4개월은 3개월 만을 머물었음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던 송시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대 제주도 사람들에게 큰 감명이었을 것이다. 이승훈은 제주에 있으면서도 민족운동과 개화주의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으며 아침에 일어나 비를 들고 거리를 청소하고 동네사람들 주목을 받는다. 어린이를 보면 옷고름을 매만져 주면서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일러준다. 동네 청년들을 모아 우물청소를 하였고 그가 살기시작하고는 동네에 싸움이 사라져 버렸다 전한다.


참고 : 이글은 1999년 11월 발행본 양진건 그 섬에 유배된 사람들 이란 책에서 간략하게 발췌하였음을 밝히며 기록 중 잘못된 내용은 읽는 이가 바로 고쳐 읽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