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삼국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 보겠습니다. 그는 가야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라 본토배기가 아니라 가야 출신자입니다. 가야는 철이 풍부한 변한에서 일어난 나라입니다. 이 철기 문화를 배경으로 고대 국가의 형태를 신라보다 먼저 갖추었던 나라입니다. 지금도 고분에서 발굴되는 가야 무사들의 철갑을 보면 그 위용이 대단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가야는 6개 가야 연맹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분열 상태였던 것이지요. 늦게 출발한 신라는 반대였습니다. 진한 12국이 완전히 통합되더니 서서히 발전을 계속하여 법흥왕 때는 가야 연맹의 최고 중심국가인 금관 가야를 멸망시키고 진흥왕 때는 대가야마저 병합시킵니다.
이 와중에 가야 왕족이었던 김유신 집안은 신라의 힘없는 귀족에 편입되었던 것 같습니다. 김유신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보면 신라 중앙 정부의 주요 요직에 있지 못했습니다.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멸망시킨 가야 출신 귀족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겠지요. 이러한 형편에서 김유신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요? 다른 귀족 소년과 같이 김유신도 화랑이 되어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신라 본토 출신 화랑들은 김유신을 우습게 보고 깔보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멸망시킨 가야 출신 화랑이 조금이라도 자신들보다 앞서 나가는 것은 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야 김유신! 너 가만히 보니까 같은 화랑이라고 우리하고 맘 먹을려고 드는데 웃기지 말아. 너는 가야 촌놈이잖아. 까불지마. 저리가. 우리하고 같이 어울릴 생각 하지마!" 이 말에 소년 김유신은 열받았을 것입니다. 분통 터지는 일이지요. 조상 잘못 만나 서러움 당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쓸쓸히 혼자 서 있었을 이 소년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기로에서 사춘기 청소년들의 그 다음 행보는 두 갈래로 나누어지지요. 하나는 좌절과 갈등이 증폭되어 비행 청소년이 되는 길, 또 하나는 오히려 여기에 자극받고 분발하여 이를 출세의 발판으로 승화시키는 길. 김유신은 후자의 길을 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조상과 집안을 핑계 삼아 소주방,비디오방,여관방 등을 전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이런 유혹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과감히 이를 물리쳤습니다. 그리고는 더욱 노력하고 준비하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 기회가 왔습니다. 김춘추라는 인물이 나타난 것입니다. 김춘추는 신라 정통 왕족이었지만 도저히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진골 출신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왕위는 성골 출신이 계승하고 있었습니다. 진골, 즉 진짜 뼛다귀 출신은 성골,즉 성스러운 뼛다귀 때문에 대권은 꿈에도 꿀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김춘추는 대권에 도전할 야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김춘추 또한 고뇌와 번뇌 속에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유신과 김춘추 두 사람은 똑같이 야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각자가 갖고 있는 핸디캡 때문에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드디어 두 사람은 만났습니다. 처음 본 순간 서로의 처지를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눈빛만으로도 교감이 오고 갔습니다. 각자의 약점을 보완하여 야망을 달성할 수 기회를 잡은 것이지요. 두 사람은 굳게 뭉칩니다. 심지어 두 사람은 처남.매부 관계까지 맺습니다.
이후 엘리트 왕족인 김춘추의 후원하에 김유신은 출세를 거듭하여 신라의 신 군부세력으로 성장합니다. 이런 든든한 신 군부세력을 등에 업고 김춘추는 드디어 구 귀족세력을 제거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는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성스러운 뼛다귀 출신을 물리치고 진짜 뼛다귀 출신인 김춘추가 대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합니다. 왕위를 차지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태종 무열왕이지요. 신라사회의 신 세력인 김유신과 김춘추의 등장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이 정권을 장악했다고는 하나, 수백년간 뿌리를 내리고 성장해 온 구 세력의 저항을 완전히 일소할 수는 없었습니다. 반면에 신 정권의 기반은 아무래도 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두 사람은 이를 타파하고 정권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도박을 감행합니다. 바로 삼국 통일 전쟁입니다. 이 전쟁이 성공한다면 신 정권의 기반은 영원히 다져지는 것이지만 반대로 전쟁이 패배로 끝난다면 이 정권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김춘추,김유신이라는 이름도 영원히 사라져야 되는 그러한 모험이었던 것입니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습니다. 김유신의 눈부신 활약으로 전쟁은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리하여 김춘추의 진골 정권은 오랜동안 왕위 계승을 안정된 기반 위에 이어갈 수 있었고, 초라한 가야 출신 김유신 집안은 이제는 신라 최고의 명문 귀족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김해 김씨가 오늘날까지도 큰 소리 빵빵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김유신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역사에는 김유신과 같은 인물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나폴레옹이지요. 나폴레옹도 원래는 프랑스가 멸망시킨 코르시카 출신입니다. 그도 김유신과 똑같은 울분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그리고는 분발하고 또 분발하여 자신의 조국을 멸망시킨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지요. 역사 속의 아이러니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인물을 보면서 우리는 더 이상 조상탓, 집안탓, 부모탓 하지 맙시다. 오히려 어려운 환경을 기회로 승화시키는 슬기를 길러 봅시다.